Book Review

아버지의 해방일지

빨치산의 딸 이야기라고 해서 이념이야기인 줄 알았다

뭔가 묵직한 메세지가 있을 줄 알았다.

그런데 독자에게 그런 부담을 1도 주지 않는다. 

첫장부터 빵 터지는 티키타카로 시작하더니 내내 재치있는 유머코드로 몰입하게 만들다가

항상 '아버지'의 자리에 있는, 빨치산이라는 이데올로기로만 규정지어졌던 아버지가

빨강도 파랑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재구성한다. 

 

오랜만에 정말 유쾌하면서 한번쯤 생각하게 만드는.. 깊이있는 소설이었다. 

 

 

밀란 쿤데라는 불멸을 꿈꾸는 것이 예술의 숙명이라고 했지만 내 아버지에게는 소멸을 담담하게 긍정하는 것이 인간의 숙명이었고, 개인의 불멸이 사의 진보가 소멸에 맞설 수있는 인간의 유일한 무기다.
얼어 죽고 굶어 죽고 총 맞아 죽는다는 전직 빨치산이 고추밭 김매는 두시간을 참지 못해 쪼르르 달려와 맥주컵으로 소주를 원샷할 때마다 나는 내심비웃으며 생각했다. 혁명가와 인내의 상관관계에 대하여. 인내할 줄 아는 자는 혁명가가 되지 않는다는 게 고등학생 무렵의 내 결론이었다.
고통이든 슬픔이든 분노든 잘 참는 사람은 싸우지 않고그저 견딘다. 견디지 못하는 자들이 들고일어나 누군가는쌈꾼이 되고 누군가는 혁명가가 된다. 아버지는 잘 못 참는 사람이다. 해방된 조국에서 친일파가 득세하는 것도참지 못했고, 사랑하지도 않는 여자와 결혼하라는 봉건잔재도 참지 못했으며, 가진 자들의 횡포도 참지 못했다. 물론 두시간의 노동도 참지 못했다. 그런데 얼어 죽을 것 같은 고통은, 굶어 죽을 뻔한 고통은, 생사의 고비를 함께 넘은 동료들이 바로 곁에서 죽어가는 고통은 어떻게 견뎠을까
사람은 힘들 때 가장 믿거나 가장 만만한 사람을 찾는다. 어느 쪽이든 결과는 마찬가지다. 힘들 때 도움받은 그 마음을 평생 간직하는 사람은 열에 하나도 되지 않는다. 대개는 도움을 준 사람보다 도움을 받은 사람이 그 은혜를 먼저 잊어버린다. 굳이 뭘 바라고 도운 것은 아니나 잊어버린 그 마음이 서운해서 도움 준 사람들은 상처를 받는다. 대다수의 사람은 그렇다. 그러나 사회주의자 아버지는 그렇다 한들 상처받지 않았다. 그들이 그럴 수밖에 없는 것은 사회의 구조적 모순 탓이고, 그래서 더더욱 혁명이 필요하다고 믿기 때문이었다.